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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팬픽 (자작)

아마노자쿠 스텝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아침 댓바람부터 요란스런 잡새들과 부산한 도시의 소음이 안식을 폭행한다. 하아. 또 아침인가. 짜증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인다. 잔뜩 얼굴을 구기며 질끈 감은 두 눈으로 다시 잠에 빠져드려 했지만 이미 한 번 기상을 한 정신은 성가시도록 각성을 재촉했다. 손을 뻗는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스마트폰을 겨우 쥔다. 오전 1032. “에이 씨. 1교신데 조졌네.”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어버린 상황.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핸드폰을 도로 엎어뒀다.

 

-

 

우리 집 모미지 애교

‘1000로 달군 쇠구슬을 얼음 요정에 데어 보았다.’

나는 모쏠, 마법의 숲 안경남

프리즘리버 챌린지

.

.

.

 

엄지가 지나는 자리를 흐리멍덩한 두 동공이 쫓는다. 기계를 만지작대는 기계적인 반복 동작. 거기에 맞춰 스마트폰 시계의 숫자들도 기계적으로 바뀌어간다.

까톡!

시체처럼 숏폼이나 보고 있자니 메신저의 알림이 울렸다. 하나가 울리니 연이어 두 번, 세 번 울려댔다. 상단바를 내려 보낸 이를 확인한다. ‘신묘마루’. 이름 옆에 필터로 예쁘게 편집된 프로필 사진을 누른다.

 

<세이자 뭐해??]

<오늘도 자체휴강?]

<늦잠?]

<세이자~~???]

 

문자의 폭격. 짧은 글들과 인싸들이나 쓸 법한 귀여운 이모티콘들이 들이닥쳤다. 1분도 채 되지 않은 간격으로. 잠자코 보고만 있으니 주파수 너머의 인물이 쉬지 않고 메시지를 날린다. 이게 질려 나도 퉁명스레 답장을 했다.

 

[?>

<안오니까 걱정되서지]

 

[니가내엄마냐>

<맨날 내가 니뒷바라지해주니까 엄마맞을지도?]

 

그리고 다시 귀여운 이모티콘들의 행렬. . 웃음이 새어나왔다. 멋대로 내 일에 참견하는 거면서. 침대에서 빈둥대면서 한동안 채팅을 주고받았다. 문득 시각을 봤다. 3시간 연강을 하는 수업이 끝날 즘이었다.

 

<세이자 점심먹자]

[귀찬은데>

<어차피 아침도 안먹었잖아]

<학식먹자~]

[학교가야되잔아>

[싫은데>

<먹자먹자~]

<겸사겸사 교수님한테 지각인정해달라고도 해보고]

 

하아. 내내 누워있느라 굳은 게으름이 연신 발버둥을 친다. 몹시 일어나기가 싫었지만 행동이 마음과 일치되지 않았다. 학생으로서 일말의 양심 때문이었을까? . 나에게 그런 것은 있을 리 없다. 밥때도 됐겠다 마침 친구가 부르니 나갈 뿐이다. 대충 씻고 사람의 몰골이라도 할 겸 한심한 몸뚱어리를 화장실로 옮겼다.

 

-

 

누가 청춘은 아름답다고 했는가. 거리를 메운 아무개들의 무리, 골목골목을 건달처럼 쏘다니는 오토바이들과 차들, 그리고 이것들이 바닥에 나뒹구는 담배꽁초들과 쓰레기들에 뒤엉킨 모습이 청춘이라면 청춘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놈들의 미적 감각은 의심을 받아 마땅할 터이다. 이런 지저분한 풍경이 캠퍼스 안에서도 이어지고 있으니 내딛는 발걸음 한 발 한 발마다 아니꼬워 미칠 지경이었다.

세이자! 여기야!”

그런 답답함 속을 뚫고 멀리서 친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진하게 팔을 흔들며 웃는 모습. 그래, 청춘을 정의한 그 잘난 놈들은 나를 보고 배워야 한다. 그렇게 논하고 싶은 아름다움은 바로 내 눈앞에 비치는 것이니.

학생식당도 사람들로 바글바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시나 거북한 분위기이다.

저기 앉을까?”

신묘마루는 고개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긴 테이블 끝 구석자리였다. 저기라면 비교적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눈치가 좋다니까, 이 아이. 인파를 피하듯 하며 우리는 그 자리로 가 마주앉았다.

모자 쓰고 먹을 거야?”

머리 안 감았거든.”

에이. 그래도 머리는 감고 나오지. 여잔데.”

잔소리. , 여느 때와 다름없는 대화였다. 신묘마루가 나에 대해 잔소리를 하면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지극히 안정적인 일상. 그 편안함 덕에 나는 수많은 타인들의 소음 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술을 뜰 수 있었다.

, 신묘찌!”

! 오린쨩! 코가쨩! 반키쨩!”

. 과 동기들이다.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는 신묘마루에게 아는 척을 해댄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신묘마루도 그 애들 하나하나와 인사를 나눈다. 차분했던 공기가 들뜨기 시작한다. 그 탓에 아까 삼킨 것이 체할 것만 같았다.

빈자리 많네? 우리도 같이 먹어도 되지?”

무리 중 화차가 신묘마루에게만 눈길을 주며 자리에 앉는다. 그런데 앉아도 하필이면 내 옆자리에.

. 키진 씨도 있었네.”

, 카엔뵤 씨, 안녕.”

눈이 맞았다. 그에 무의식적으로 인사가 나왔다. 멋쩍은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까지만 해도 편안했던 심기가 순식간에 가시방석에 앉은 듯 초조해졌다. 차례로 빈자리를 채우는 카라카사와 로쿠로쿠비의 시선도 느껴지면서 이 불편함은 더 강해졌다. 나는 내 맞은편의 여자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나 나를 빤히 한 번 보더니 신묘마루는 이 불청객들과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제길. 아까 눈치가 좋다고 생각한 것은 취소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식사였다. 신묘마루는 내내 그 녀석들과 웃으며 떠들었다. 인싸들은 서로 모이면 대체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어대는 걸까? 들어봐도 시답잖은 이야기들뿐이면서. 그래도 그 인싸 무리들은 식사를 끝내자마자 지들끼리 먼저 자리를 떴다. 신묘마루가 나와 같이 교수실에 간다고 한 덕이었다. 나는 깨작대며 남은 밥을 먹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신묘마루와 둘만 남았을 때야 비로소 수저를 놨다. 폭풍 같은 점심이었다.

 

-

 

키진 씨, 이제 한 번 더 결석하면 F예요. 지각 세 번에 결석 한 번인 것도 알고 있죠? 다음 수업에는 필히 참석해주세요.”

 

하아.”

교수실을 등진 우리의 앞에 오후의 햇살이 복도에 보란 듯 퍼질러져 있었다. 두 사람분의 발걸음은 확실히 무거운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나 혼자만 그런 걸지도.

다음부터는 꼭 수업 와야겠다, 그치?”

우루미년! 이걸 지각 인정을 안 해줘?! 교수면 다야? 젖탱이만 큰 게!”라고 소리를 질렀다. 마음속으로.

그러게.”

우시자키 교수님 다음 수업이 모레네. 1교시.”

1교시라는 말이 들리자 다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어나기 힘들면 내가 모닝콜 해줄게.”

아니,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터벅터벅. 힘없는 발자국 소리가 텅 빈 복도에 튕겼다. 강의실 창문 너머로 몇 학년인지 모를 학생들이 전공과목에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 내 모습이 겹쳤다. 불쾌감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모레에는 내가 저기에 앉아 있어야 하는구나. 앞길이 막막하여 내일까지는 자체휴강을 하기로 했다.

 

-

 

아동들의 인지적 성장 과정은 크게 4가지의 공통적인 범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장 피아제에 따르면.”

오전 940. 1교시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나는 지나간 레일 위에 슬그머니 발을 디뎠다. 무사히 강의실 맨 뒤 빈자리에 착석했다. 우시자키 교수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책상에 엎드려 졸도한 녀석들이나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녀석들이나 그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신묘마루만 빼고. 나보다 더 앞자리에 앉아있던 신묘마루는 몸을 뒤로 살짝 돌려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몸을 최대한 낮춘 채 눈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이네. 그래도 지각처리만 해주셔서.”

이게 다행인 일인가? 교수를 쫓아 화장실도 갔다가 교수실도 갔다가 그리고 잔소리 좀 듣고 강의실로 돌아오니 쉬는 시간의 3분의 1이 날아가 있었다. 맥이 다 빠진 채로 강의실로 돌아와 그래도 남은 시간 동안 잠이나 좀 잘 심산으로 책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거 알아? 미즈하시 선배랑 호시구마 조교님이랑 사귄대!”

그 선배가?”

근데 저번에 호시구마 조교님 다른 과 여자분이랑 같이 학식 먹던데? 이름이 미야데구치였었나?”

? 대박!”

하아. 편히 자는 것도 안 되는 건가? 아침 시장이라도 열린 듯 여기저기서 수다가 귀청을 두들겼다. 여자애들은 남의 얘기가 그렇게 좋은 걸까? 나도 같은 여자지만 저런 가십거리로 저렇게 떠들 수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머, 미즈하시 선배랑 호시구마 선배가 그런 사이였구나!”

신묘마루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가방도 책도 챙겨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근데 여자만 있는 과에 왜 이리 레즈비언들이 많은 거냐?”

미즈하시 선배 졸업학점 다 못 채워서 5학년 다니고 있는 사람 아니야? 우리 2학년 수업도 듣던데. 자꾸 수업 빠지셔서 몇 번 본 기억은 없지만.”

수업이나 제대로 듣고 빨리 졸업이나 하시지. 사립 유치원에라도 취직할 수 있으시려나 몰라.”

순간 앞에서 떠들고 있던 소리가 그쳤다. 그러고는 수다를 떨던 이들 모두가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 미안. 키진 씨한테 한 말은 아니니까. 하하.”

그 중 한 명이 멋쩍게 말했다. 얼떨결에 나도 멋쩍게 헛웃음을 지었다. ? 잠깐. 뭐지? 무슨 의미지? 뭔가 바보 같은 취급을 당한 느낌인데? 그때 우시자키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실컷 떠들던 녀석들도 입을 다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열불이 올라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2교시가 시작된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내 마음은 짜증으로 더 요동치고 있었다. 아아! 내가 이래서 학교에 오고 싶지 않았던 건데!

 

-

 

온통 푸른빛투성이다. 하늘은 구름에 가리는 것 하나 없고, 햇볕을 머금은 나뭇잎마저 푸르다. 그리고 캠퍼스의 어중이떠중이들의 면면도 푸르다. 너무 푸르러 울화가 치밀 정도이다.

다들 축제 준비로 들떠있네.”

! 축제 따위.”

나무 밑 벤치에는 그늘이 졌다. 나는 등받이에 양팔을 걸치고 삐딱하게 앉은 채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하나를 노려보았다.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 과일라떼를 홀짝이고 있는 신묘마루의 표정과는 정반대의 것으로. 그러다 어느 여자 둘이 나를 흘긋 쳐다보고는 지들끼리 속닥거리며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뭐 하는 년들인지는 몰라도 같은 과인 것 같긴 한데.

나 그냥 자퇴나 하려고.”

뭐어? 갑자기 무슨 말이야?”

의외의 발언에 신묘마루가 놀란 듯 나를 쳐다봤다. 나보다 머리 하나 차이의 자그마한 키와 작은 몸집에서 발하는 그 풍부한 표정이 망막에 맺혔다. 심각한 화제를 꺼낸 뒤였지만 왠지 마음이 평온해지는 느낌이었다. 찰나의 감상 후에 나는 말을 다시 이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부드러워진 말투로.

그냥 뭐, 전체적으로 나한테 안 맞는 거 같고, 또 유아교육과 같은 데 나와서 뭐 해먹고 살지도 모르겠고.”

. 그래도 자퇴하면 아깝잖아. 그 동안 잘 해왔는데.”

잘 해오긴 뭘 잘해와.”

, 맞다! 야쿠모 복지법인이 이번에 아동복지사업 시작한다던데?”

? 거기 노인복지전문이잖아.”

어쨌든 우린 일자리 늘어나서 좋은 거지. 유아교육과 나와도 자격증만 따면 갈 수 있잖아?”

야쿠모 유카리, 노인들만 돌보다가 드디어 노망이 났나 보네. 새 사업을 해도 굳이 돈 안 되는 걸 하고.”

그러니까 같이 좀만 더 버티자. 혼자 있는 것보다 둘이 있는 게 더 재밌기도 하고. 그치?”

신묘마루가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아아, 저 미소! 내가 퉁명스레 대답해도 신묘마루는 미소로 되돌려준다. 그 덕일까? 방금까지 들었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잠시 수면 아래로 잠겼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공부가 어떻든 취업이 어떻든 지금은 이 아이와 더 있고 싶다. 이젠 그런 마음뿐이었다.

신묘마루, 오늘 축제 보러 갈 거야?”

툭 던진 질문에 신묘마루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약간 능글맞은 미소로 답했다.

아니~? 오늘은 딱히 약속도 없어서~”

그 대답에 나 또한 표정이 환해졌다. 역시 눈치가 좋다니까! 단 둘이 있을 오늘밤을 상상하며 나는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색은 푸른빛이었다.

 

-

 

어둠이 깔린 원룸촌의 거리는 고요했다. 평소라면 술에 쩐 고주망태들을 슈팅게임의 탄막처럼 흩뿌렸을 거리였지만 지금은 몇 백 미터 떨어진 대학교 축제에 모두 뺏긴 상태였다. 간만의 쾌적한 어둠 속에서 나와 신묘마루가 있는 원룸만이 밝았다.

! 오늘 축제에 조수기악 왔었다네?”

조수기악인지 조수기아인지 알 게 뭐야.”

나는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캔을 꺼내 신묘마루에게 하나를 건넸다. 정강이 정도의 높이의 작은 테이블 위에는 편의점에서 산 과자와 싸구려 고기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마주앉은 우리는 서로의 캔을 부딪쳤다.

 

밤은 비워지는 맥주캔의 수마다 점점 무르익어갔다. 그리고 깊어지는 시간만큼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방을 채워갔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배꼽 잡고 웃었고, 내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신묘마루는 긍정적인 말을 해줬다.

누구나 힘든 일은 있는 거잖아. 무슨 역경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바라기보다 우린 그냥 예전에 있던 좋은 일을 나중에 또 반복하려고만 하면 돼. 그러면 한층 편해진다?”

예전에 있던 좋은 일이라.”

맥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초점 없는 동공은 목으로 넘어가는 차가운 알콜의 감각을 느끼며 옛 기억을 되짚는다. 짜증과 불행으로 점철된 과거에 좋은 일이 있을 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지는 폭발음.

? 불꽃놀이 하나 보다!”

그래. 좋은 일이라면 있다. 어차피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을 불꽃놀이를 보려 창문 밖으로 몸을 빼는 저 순진한 모습을 보니 불현 듯 떠오른 기억이.

 

대학은 관심도 없었다. 지원한 유아교육과도 그냥 성적에 맞춘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합격을 하고 나서도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무지했다. OT인지 새터인지에 관심도 없었고, 과 단톡방에도 입학일 이틀 전에야 초대됐다. 대학은 두어 번 대충 눈도장만 찍고 그만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음뿐이었다. 엄마가 달의 도시에서 요괴의 산으로 내려오면서까지 부랴부랴 집도 구해주고 내 딸내미지만 너 같은 년은 내가 못 믿겠다.”2주 정도 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억지로라도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수업은 학과사무실에서 조교가 알아서 짜준 대로 들어야 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전공 수업을 들으러 가니 분명 나와 동기일 녀석들은 첫 수업이었음에도 진즉 서로 친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자기들끼리만 떠들고 그 누구도 나에게 아는 척을 해주지 않았다. 낯선 환경, 낯선 인파에 멍하니 있자니 머리에는 아무 정보도 들어오지 않았고, 매일이 스트레스였다.

교양 수업은 학과에서 지정하지 않은 것도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뭘 알고 수강신청을 했겠냐마는. 그저 학과사무실에서 조교가 넌지시 던진 추천을 듣고 아무 생각 없이 수강신청을 한 결과 나는 이상한 무도장 같은 곳에 있게 되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무용의 이해 강의를 맡은 강사 니시다 사토노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교양 수업에서는 확실히 같은 과 동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같은 과든 아니든 다 처음 보는 면면인 것은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저들도 서로서로를 모르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 왠지 위안이 되었다. 마침 강사가 수업은 두 명씩 한 조로 한 학기 동안 쭉 진행한다고 하니 나는 여기서 나와 조가 될 누군가와 친구가 되어 어색한 한 학기를 버틸 계획이었다. 자유롭게 조를 짜서 오라는 강사의 말이 떨어진 그때였다. 거기에 서있던 아무개들이 기다렸다는 듯 금방 서로 짝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황당해서 얼어있었다. 여기서마저도 소외감을 느끼다니! 이 상황이 정말 견디기 힘들어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때였다.

, 있다! 키진 씨 맞지?”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얼어붙은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귀여운 보랏빛 단발.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차이나는 아담한 몸집. 예쁜 미소를 띤 말랑해 보이는 하얀 얼굴.

귀엽다!’

그것이 내가 신묘마루를 처음으로 인식한 기억이었다.

모르는 사람이랑 조 될까봐 걱정했다구! 키진 씨, 우리 같이 하자!”

, 저를 아세요?”

귀여운 얼굴에 한 번, 살갑게 다가오는 모르는 사람에 한 번 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우리 같은 과잖아! 유아교육과!”

, 같은 과 아이였구나. OT도 새터도 참가하지 않았으니 얼굴은커녕 이름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얘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못한 채로.

. 키진 씨는 나를 잘 모르나 보구나. 나는 스쿠나 신묘마루야. 성으로 불러도 되고,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어. 잘 부탁해!”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며 신묘마루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거기에 나도 자동적으로 손을 뻗어 악수를 했다. 한 차례의 돌풍이 몰아치듯 이뤄진 첫 만남에 강의실을 뛰쳐나가려던 내 마음은 어느 새 사라져 있었고, 그렇게 나와 신묘마루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신묘마루가 친근하게 다가온다고 나도 선뜻 마음을 내준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 사귄 친구였기에 친절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뭐랄까, 왠지 모를 부담감이 있었다. 고작 나 따위가 이런 귀여운 아이와 친하게 지내도 되는 걸까 하는 부담감이. 무엇보다 이런 부담감은 전공수업을 들을 때 더 심해졌다. 신묘마루는 과의 누구와도 친하게 지냈다. 반 학기 동안 다른 동기들과 사적인 말조차 섞어 본 적 없는 나하고는 정반대였다. 딴 아이들과 웃고 떠들고 있는 신묘마루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째서인지 화가 났다. 마치 나의 집에 외부인들이 허락도 없이 마구 들이닥치는 꼴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달까? 또 한편으로는 나는 애초부터 이 집과 어울리지 않은 녀석이 아니었을까 하는 자괴감도 들었으니. 그래서였을까? 나는 수업을 빠지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그래도 무용의 이해 수업은 꾸준히 참석했다. 신묘마루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으니까.

세이자! 어제도 수업 안 왔지? 톡도 안 보고! 걱정했단 말이야!”

뭐 걱정할 것까지야.”

안 되겠다. 이제 매일매일 나랑 톡해!”

?”

신묘마루는 어째서인지 나를 많이 신경써줬다. 내가 수업을 가지 않은 날이면 과제가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건 기본이었고 내가 밥을 혼자 먹으려 하면 매번 함께 먹어줬다. 그리고 당시에는 동기들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도와주려는 행동도 많이 보여줬다.

우리 조는 오린쨩, 코가쨩, , 그리고 세이자야! 조별과제 역할분담하기 전에 이야기나 좀 해볼까?”

하루는 전공 수업 때 조별과제를 할 때였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으니 신묘마루가 나서서 나를 포함하여 조를 짰다. 타타라 코가사와 카엔뵤 린은 신묘마루와 자주 붙어 있는 녀석들이었다. 그 말은 나에게는 가장 껄끄러운 녀석들이라는 말이었고. 신묘마루는 우리가 같이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 마음에 부응하지 못했다.

키진 세이자 씨 맞지? 얘기 나눠본 기억이 없네. 카엔뵤 린이야. 잘 부탁해.”

, , , , , , , , 잘 부.”

세이자는 정말 좋은 애야! 생각도 깊고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 분명 우리 과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신묘마루는 쭈뼛대며 말을 더듬는 나를 대신해 애들에게 내 소개를 해줬다. 여기까지만 말해줬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신묘마루는 굳이 안 했어도 될 말을 덧붙인 것이었다.

세이자는 달의 도시에서 왔대. 어머니는 달의 도시에서 유명한 높은 분이신 키신 사구메 씨래! 멋진 애지?”

, 신묘마루. 그 얘기는.”

, 그래?”

심장이 철렁했다.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정보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른 애들의 얼굴을 봤다. 그들의 얼굴은 천진한 표정을 짓는 신묘마루의 것과는 달랐다. 분명했다. 저들은 속으로 내 흉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달의 도시에서까지나 와서 사회성이 떨어진다면서 흉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패닉이 왔다. 신묘마루와 딴 애들이 뭐라 뭐라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 어디 가는 거야?”

그 이후로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원룸의 침대에 누워있는 나 자신을 보면 그저 당시의 상황이 견디기 힘들어 충동적으로 강의실을 뛰쳐나와 무작정 집으로 돌아왔을 것임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불을 켜지 않으면 5평짜리 원룸 전체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시간이 되어서야 간신히 제정신이 돌아왔다. 핸드폰을 켰다. 조별과제를 위해 신묘마루가 만들어 놓은 단톡방 아이콘에 읽지 않은 메시지들이 잔뜩 있다는 표시가 있었다. 그 표시를 멍하니 응시만 하고 있으니 핸드폰의 화면이 저절로 어두워졌다. 방 안은 핸드폰의 희미한 빛마저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2주가 흘렀다. 그 동안 나는 학교는커녕 바깥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핸드폰 단톡방 아이콘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많다는 뜻의 99+ 표시가 무슨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내가 이탈한 그 날 이후로도 톡은 몇 번인가 더 왔던 것 같았다. 하지만 무음 설정을 해놨기 때문에 얼마나 왔는지는 대략적으로도 알 수 없었다. 오줌이 마려워 침대에서 일어났다. 딱히 누군가와 연락을 하는 것도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한 손에는 핸드폰이 들린 채였다. 화장실을 향하면서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습관처럼 상단바를 내렸다. 그런데 뭔가 특이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 단톡방 알림 외에도 다른 읽지 않은 톡의 알림이 하나 더 있던 것이었다. 신묘마루가 보낸 것이었다. 이 알림 또한 99+ 표시가 달려 있었다. 그런데 상단바에 뜬 최근 것의 보낸 시각을 보니 바로 방금 전이었다. 얼떨떨하던 정신이 순식간에 번쩍 들어 나는 곧바로 신묘마루와의 톡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한 번 놀랐다. 신묘마루는 내가 잠적한 이래로 지금까지 매일 수 개씩 톡을 보내고 있던 것이다! 읽지 않은 가장 처음의 것부터 메시지를 훑었다. 역시나 걱정이 된다는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일상적인 것들이 더 많았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맛집을 가자느니 길에서 본 귀여운 고양이가 어떻느니 하는 것들이 말이다. 그리고 개중에는 동영상도 몇 개씩 있었다. 나는 가장 처음의 동영상부터 순서대로 재생했다.

세이자~ 오늘 무용의 이해 수업에서 배운 탱고스텝이야! 네가 없어서 혼자 연습해야 했지만 열심히 했어. 나중에 네가 오면 같이 출 수 있게 영상 찍어서 보내줄게!

오늘 수업은 없었지만 춤 연습했어! 어때? 좀 잘 추는 것 같나? 다시 같이 춤출 수 있으면 좋겠다!

곧 무용의 이해 시험이래. 수업 때 나는 강사님이랑 스텝 연습을 하고 있어. 그래도 내 파트너는 너잖아. 시험은 너와 같이 보고 싶어. 나중에 네가 돌아오면 잘할 수 있도록 네 스텝까지 내가 찍어서 보내줄게!

손이 떨렸다. 나는 완전 실망스러운 행동을 했는데도 이 아이는 나를 한 번도 질타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이렇게 내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내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신묘마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핸드폰을 쥔 채로 얼음처럼 굳어 가만히 있었다. 그 때 톡이 다시 왔다.

<! 세이자 톡봤구나!]

<좀괜찮아? 아픈데는없고?]

나는 다시 얼어붙었다. 반응을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떠오르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의미 없는 글자들을 썼다가 지우고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린 한 문장을 써서 답장을 보냈다.

[어떻게계속톡한거야>

식은땀이 흘렀다. 그 동안의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한 말이 이 따위라니! 속으로 자책을 하는 동안 신묘마루로부터의 답장은 금방 왔다. 다시 한 번 나의 정신을 일깨운 그 답장이.

<매일매일 톡하기로 했잖아ㅋㅋ]

다시 충동적인 감정이 나를 움직였다. 대충 모자 하나를 눌러쓰고 카디건 하나를 걸친 후줄근한 파자마 차림으로 냅다 내달렸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계산은 없었다. 그저 내달린 다리가 이끄는 곳으로 계속 달렸다. 마침내 학과 건물 앞에서 멈춘 나의 다리는 틀리지 않았다.

세이자, 안녕?”

환하게 웃던 그 얼굴. 그날은 유독 햇살이 따사로웠다.

 

-

 

불꽃놀이 끝났나 보네.”

무슨 재밌는 구경을 했는지 제법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신묘마루는 창문에 기댔던 몸을 세우고 기지개를 쭉 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2주 만에 신묘마루를 만난 그 당시의 일 이후, 학교에도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학교를 가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결정이었다. 가뜩이나 존재감도 옅은데 큰 민폐까지 끼쳤으니 이제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것은 명백했으니까. 그리고 용기를 내 다시 학교를 갔을 때 실제로 그러했다. 평소에 나에게 관심이 없던 이들도 나를 슬쩍 노려보거나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 것이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뭐 내가 자초한 일이니 어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긴 했다. 그래도 신묘마루만은 늘 내 옆에 앉아주거나 밥도 같이 먹어주는 등 나와 함께해주는 덕에 어느 정도 견딜 수는 있었다. 그래, 어느 정도는. 아무리 신묘마루가 나와 함께해준다고 해도 다른 이들과도 생활해야 하는 그 거북한 환경을 오롯이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피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과도 같은 생활의 모습이고. 그래도 당시에 신묘마루와 함께한 무용 교양 수업만은 최선을 다했다. 전공 수업을 땡땡이치면서까지 혼자 춤 연습을 했고, 신묘마루에게 공강이 있는 날이면 같이 만나서 연습하기도 했다. 수업을 듣지 못한 2주의 분량만큼 따라잡아 신묘마루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또 신묘마루가 나에게 쏟은 선의에 보답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였을까, 무용의 이해의 시험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세이자, 나 오늘 자고 갈게.”

술기운이 돌아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한 신묘마루를 내가 잽싸게 안아 부축했다.

자고 가는 건 상관없는데. 씻고 자. 물 받아줄게.”

세이자 먼저 씻어~ 난 조금만 잘게~”

신묘마루는 다시 비틀거리며 내 침대에 가 누웠다. 눈을 감은 표정에는 평온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오늘 중 가장 기분이 좋은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질러진 술상을 구석으로 밀어 넣고 대강 정리를 한 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비몽사몽한 신묘마루가 내 여분의 잠옷을 입을 수 있도록 도와준 뒤, 침대에 더 편히 누울 수 있게 해줬다. 불을 끄고 그 옆에 나도 누워 깜깜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있던 좋은 일을 나중에 또 반복한다라.’

무슨 깨달음 같은 것이 머릿속에서 형태를 잡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곧 어떤 결심이 되어 내 안에서 명확해졌다. 좋아, 이제 꼭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 옆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행복한 밤이 내려앉는다.

 

-

 

신묘마루는 늘 나를 챙겨줬다. 고맙고 황송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행복함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이 행복함은 오로지 나만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해서는 안 된다. 그 동안 느낀 이 행복을 나만이 느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제는 내가 신묘마루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자고. 하지만 신묘마루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의 상태로는 어림도 없었다.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그렇다면 가장 빨리 나의 결심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 그래, 그 방법은 돈이었다. 돈이 많이 있다면 마음껏 신묘마루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켜 연락처를 살폈다. 내게 돈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여보세요, 엄마?”

, ?”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첫마디는 차가운 단답이었다. 침을 꼴깍 삼키고 나는 말했다.

나 용돈 좀 올려줘.”

얘가 갑자기 전화해선 한다는 말이 그거야? ?”

아니, 필요하니까. 그냥 용돈 올려달라고.”

에휴. 얼마?”

나는 바라는 금액만큼을 말했다. 현재 받고 있는 용돈의 10배 정도였다. 수화기 너머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아이고! 내가 방도 구해줘, 월세도 내줘, 등록금이니 뭐니 다 해줬는데 뭐? 그게 할 소리니?”

, 엄마 돈 많이 벌잖아!”

돈은 왜 또 그렇게 많이 필요한데? 어디 빚졌어?”

아니,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좀 주라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그 침묵에 앓는 소리도 좀 섞인 것 같았다. 뭔가 안 좋은 분위기였다.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떼려던 그때였다.

이 화상아, 화상아!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고 애지중지 키웠더만 골수까지 다 빨아먹으려 하는구나! 내가 못 살아!”

침묵을 깬 것은 속사포 같은 잔소리였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나는 핸드폰을 반사적으로 귀에서 멀리 뗐다.

? 내가 그래도 너 애비 없는 년이라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초중고 다 졸업시키고 어? 대학까지 보내놨는데 대체 철은 언제 들래, 철은? 그리고 학교는 잘 다니고는 있는 거니? 엄마가 달의도시대학이나 환상향대학을 가라고 하지도 않았잖니! 요괴의산대학이라도 다녔으면 말도 안 해. 그런데 뭐? 요괴의산기슭대학? 엄마가 쪽팔려서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못 들어! 그래도 그런 데라도 다니면 학교라도 잘 다녀서 취업이라도 잘 해야 할 거 아니니! 그리고 저번 명절 때 집은 왜 안 왔어? ?”

얼굴로부터 30cm는 떨어뜨려놓은 핸드폰. 스피커폰으로 해놓은 것도 아닌데 엄마의 불같은 잔소리가 여전히 귀청을 때렸다. 엄마는 늘 그랬다. 한 번 잔소리를 시작하면 상관이 없는 일까지 끌어들여 잔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딱 그럴 느낌이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떽떽 화내고 있는 전화를 뚝 끊었다. 한숨을 한 번 푹 쉬었다. 용돈을 더 받는 계획은 실패했다. 이제 하는 수 없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한 다음 방법을 써야 할 때였다.

 

-

 

별일이네, 복권을 이렇게나 많이 사고.”

해가 기다란 노을을 늘어뜨리고 있는 저녁이었다. 나란히 걷고 있는 나와 신묘마루의 손에는 수십여 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로또 복권들과 즉석복권들이 종류별로 들려 있었다. “다 너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산 거야.”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냥 갑자기 땡겨서.”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제대로 된 고백은 1등에 당첨되고 나서 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우리보다 앞선 그림자를 밟으며 원룸으로 향했다.

 

, , , 오천 원, , 천 원.”

세이자~ 복권 긁는 거 생각보다 팔이 너무 아픈데?”

그러면 좀 쉬었다가 로또 번호 체크나 할까?”

밤이 깊도록 우리는 즉석복권 긁기 삼매경이었다. 그러나 산을 이룬 긁은 복권들의 더미는 거의 꽝이 퇴적된 매립지였다. 팔이 빠지도록 긁은 보람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흔적이었다. 우리는 복권을 긁던 동전을 내려놓고 잠시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이번에는 펜을 들어 로또 복권의 번호들을 체크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눈치 챌 겨를도 없이.

어떻게 잤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을 떠보니 신묘마루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었고, 나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누구 놀리는 것 마냥 뺨에 달라붙은 복권을 떼어낸 후, 자고 있는 신묘마루를 깨웠다. 복권들과 거기서 나온 쓰레기들로 어질러진 방을 대충 치워놓고 우리는 컵라면으로 늦은 아침을 때웠다. 신묘마루는 일정이 있다며 라면을 먹고 바로 집을 나섰다. 홀로 남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평소에도 지저분한 방이었지만 이번에는 나조차도 치가 떨릴 만큼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에는 희망이 더해진 곳이었다. 1등에 당첨될 것이라는 희망이. 신묘마루를 행복하게 해줄 희망이. 그런 희망을 안고 나는 이 난장판 속에서 아직 긁지 않은 즉석복권들을 찾아 마저 긁었다.

 

-

 

희망은 확률의 기만이다. 점심도 거르고 긁은 즉석복권들도 결국 종이쪼가리들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너무 허탈하고 분노가 차올라서 그냥 테이블을 확하고 뒤집어엎어버렸다. 어떻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거지. 그때 쓰레기더미 속에서 어제 체크한 로또 복권들이 보였다. 그래, 아직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 수많은 남은 희망들을 모아 번호 확정 영수증으로 교환하기 위해 복권 매장으로 향했다.

또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내가 이래서 로또 복권을 싫어한다. 어차피 낙첨을 뿌릴 거면서 추첨일까지 사람을 기대하게 하는, 기만도 이런 기만이 없다. 뒤로 발라당 쓰러져 누웠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곰팡이 펴 얼룩진 천장뿐. 신묘마루는 어제도 나와 함께해줬다. 혼자 있는 나에게 어김없이 다가와 먼저 웃어줬다. 양손으로 얼굴을 덮어 쓸어내린다. ‘신묘마루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이 작은 바람조차도 나 따위는 이룰 수 없는 건가. 텅 빈 눈으로 핸드폰의 화면만 들여다본다. 작은 화면에는 이번 회차의 당첨번호가 비웃듯 적혀있다. 멍하니 스크롤만 위아래로 반복해 내렸다가 올린다. 그런다고 결과가 바뀔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다 갑자기 이전 회차의 당첨번호가 화면에 떴다. 손가락을 놀리다 우연히 이전 회차로 가는 마크가 눌렸나 보다. 화면에 새로 뜬 번호들을 빤히 응시한다. 아무 생각 없이. 잠깐!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번호가 왠지 낯이 익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몸을 일으켜 한때 희망이었던 종이쪼가리들을 뒤졌다. 그리고 찾았다, 가장 처음 확인했던 로또 복권을! 거기에는 지금 화면에 떠있는 번호와 정확히 일치하는 숫자들이 고고히 늘어서 있었다. 으아아! 이 복권을 지난주에 샀다면! 몇 분을 바닥을 뒹굴며 아쉬워서 그렇게 난동을 부렸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손에 쥔 꽝 복권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펜을 찾아 들었다.

 

-

 

복권 1등에 당첨되셨을 경우, 당첨금 수령을 위하여 당첨 영수증 원본과 신분증을 지참하시어 텐큐은행 본점으로 방문해주십시오.

 

지난밤은 거의 뜬 눈으로 지샜다. ‘내가 지금 제대로 된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돈을 받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아니, 혹시라도 1등 당첨금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되지?’ 같은 온갖 잡념으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날이 밝자 나는 곧장 은행으로 나섰다. 일이 있어 고향에 간다는 톡 하나를 신묘마루에게 남기고.

해가 느릿느릿 황소걸음 하는 오전에도 은행에는 부지런한 사람들로 붐볐다. 넓은 사무적 공간은 사람들의 주고받는 목소리로 가득했지만 단어고 문장이고 분간할 수 없었다. 단지 시끄러워서였기 때문인지 머릿속이 번잡해서였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창구 대기번호표와 손바닥보다도 작게 접은 로또 영수증을 손에 꽉 쥔 채로 고개 숙인 채 차례를 기다릴 뿐이었다.

아아아! 이즈나마루 자식! 지가 지점장이면 다냐고! 순 갑질만 해대고! 내가 진짜 이 은행 언제 한 번 크게 조진다!”

띵동 하고 창구 알림음이 울렸다. 그리고 고객 번호를 부르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 그 소리에 한 순간에 정신이 집중되어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번호를 보니 내 바로 전 번호였다. 곧 내 차례라는 사실에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쿵쾅댔다. 식은땀도 흘렀다. 모든 정신이 그쪽으로 향해 그 창구에서 나는 작은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손님!”

, !”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잔뜩 경직되어 나도 모르게 대답을 했다. 은행의 모두가 나만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부끄러워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창구로 갔다.

텐큐은행 고토쿠지 미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창구 직원이 새는 듯한 소리로 형식적인 인사를 했다. 면대면으로 마주하는 대신 정수리를 들이밀면서 두 눈알을 위로 치켜들어 직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림자처럼 드리운 다크서클, 피곤에 찌든 듯한 두 눈에는 짜증이 풍겼다. 아까 이 사람이 화낸 목소리도 떠오르는 게 괜히 겁이 나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뭘 도와드릴까냐고요!”

, , , , , 이걸.”

윽박지르는 소리에 움츠려든 몸이 더 움츠려졌다.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나는 꼼꼼히 접은 복권 영수증을 직원에게 건넸다. 영수증이 내 손을 떠나자마자 직원의 화난 혀 차는 소리가 다 들렸다. 미리 펴서 주지 않았던 것이 더 화를 돋운 것일까?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 있던 차에 그 사람은 영수증을 다 펴고 읽고 있었다.

고객님 이건 꽝이잖.”

역시나 안 되는 거겠지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을 하다가 멈추는 것이었다. 거기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려 그 직원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 고객님. 이거 지난 회차 복권이네요! 1등 축하합니다!”

? , .”

설마 먹혀들어간 건가, 영수증의 회차 부분에 지난 회차를 덧씌운 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가 넘치던 이 사람의 모습이 지금은 약간 들뜬 듯이 바뀌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것저것 떠벌리기 시작했다. 당첨금 수령 시 유의할 점이 어떻고, 세금이 어떻고, 통장 사본이 어떻고 이런 말들이 나왔던 것 같다. 뭔가 너무 내 뜻대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내용이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지막으로 통장 비밀번호 설정해주셔야 되는데요, 우선은 제가 기본 비밀번호로 설정해드렸습니다. 돈이 한꺼번에 많이 입금이 될 거라서요, 통장에 금액이 찍혀도 당장은 사용하실 수 없거든요. 일주일 뒤면 출금 가능해지셔요. 그때 앱에 들어가셔서 비밀번호 재설정해주시면 돼요.”

이 말을 끝으로 내 손에는 새로운 통장이 쥐어졌다. 심장이 다시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이제 끝난 건가? 다 제대로 된 건가? 고개도 들지 않고, 몸도 어색하게 숙인 채 잰걸음으로 재빨리 은행 밖으로 나왔다.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숙인 몸으로 그늘을 만들어 간신히 눈을 떴다. 손 위의 통장. 그 통장을 살며시 열었다. 첫 장에 적힌 숫자가 보인다. 한 눈에 봐도 곧바로 읽히지 않을 정도의 큰 숫자. 이게,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진짜로 현실인가? 호흡이 너무 빨라져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런 답답한 고통이 느껴진다. 그래, 이건 진짜 현실이었다! 태양마저 이제 현실에 눈을 뜨라는 듯 따갑게 살갗을 때렸다.

 

-

 

하얗고 넓은 공간이 보인다. 마치 어느 교회의 모습 같기도 하고, 재벌들의 사교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곳곳에 환한 불빛들이 축복하듯 이곳을 밝히고 있다. 내가 서있는 바로 앞에는 직선으로 길게 뻗은 하얀 길이 보인다. 그리고 그 양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내가 그 길을 걸어오길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 누군가의 힘찬 외침이 들린다.

신부 입장!”

웅장하고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나는 양손으로 드레스를 바닥에 끌리지 않을 정도로 살짝 들어올리고 품격이 있는 걸음으로 이 길을 나아간다. 드레스는 우아한 핑크빛. 생전 본 적도 없는 고급스러운 원단과 세련된 디자인이 이곳을 채우는 고상한 음악과 나의 발걸음마다 퍼지는 사람들의 환호, 갈채와 어울러져 나를 한층 더 우아하게 만든다. 축하와 축복을 받으며 내딛은 걸음걸음은 길의 끝에 다다른다. 몸을 돌려 내가 걸어온 길을 본다. 양쪽으로 정말 많은 이들이 나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가장 앞에는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엄마는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나에게 질투하는 표정을 보이고 있다. 그 모습에 나는 슬쩍 비웃는 미소를 지어준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길의 저 끝에는 큰 문이 보인다. 예쁜 문양으로 꾸며진 화려하고 큰 문이다. 곧 그 큰 문이 젖혀져 열린다. 열린 문에서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한 빛이 비쳐 들어온다. 그리고 이내 그 빛의 정체가 드러난다.

!”

신묘마루다! 봄빛처럼 맑고 깊은 하늘색, 과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움이 넘치는 드레스를 입고 다소곳이 서있는 신묘마루. 그 모습에 홀려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온다. 또 다시 외침이 들린다.

신부 입장!”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봄빛. 사랑스러운 나의 신부!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황홀하여 넋을 놓고 바라볼 뿐이다. 오래지 않아 나의 신부는 나의 옆에 나란히 선다. 우리는 서로 마주본다.

세이자, 사랑해.”

나도 사랑해. 내가 꼭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마주본 우리는 서로 사랑의 말을 나눈다. 그리고 나는 영원한 행복을 약속한다. 서서히 아름다운 그 얼굴이 나와 가까워진다. 그 가까워짐을 느끼며 나도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얼굴을 그녀 쪽으로 향한다. 숨결이 느껴진다. 나와 신묘마루의 숨결이 섞이며 하나가, 하나가 되려 한다. 이제 곧.

결혼식 멈춰! 경찰이다!”

우당탕탕 하는 소음과 함께 주위가 일제히 소란스러워졌다. 식겁하여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식장의 거대한 문이 처참히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고, 그 앞에는 제복을 입은 두 경찰이 위협적으로 서 있었다. 손에는 권총을 들고. 그것을 본 하객들은 혼비백산했고 이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거지? 당황한 채 나는 신묘마루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신묘마루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는 공포감에 구역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저 경찰들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키진 세이자! 네 녀석을 복권 당첨금 부정 수령죄로 체포한다!”

두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다. 그리고 이 두 경찰들은 난폭하게 나를 잡아 문 밖으로 끌고 간다. 놔두라고 소리치며 발버둥을 쳐보려 했지만 소리도 나오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음악 소리가 멀어져 간다. 화려했던 예식장의 풍경도 멀어진다. 잠시나마 행복했던 순간이 흐려지고 점점 어두워진다.

 

-

 

아아악!”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슴이 터질 듯 숨이 몰아쉬어진다. 침대 위였다. 온몸은 물론 누워있던 자리도 땀으로 흥건하다. 꿈이었나?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은 채 심호흡을 한 번 한다. 그래. 나도 안다, 내가 한 짓은 명백한 범죄임을. 복권 회차 번호를 바꿔 덮어 쓸 때부터 이 짓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진작에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이 신묘마루를 위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그리고 은행 직원이 속아 넘어가 준 덕에 내가 한 짓은 분명한 확신이 되었다. 머릿속이 냉정해지자 두려움이 소름처럼 온몸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이다. 그런 큰돈을 나는 불법적으로 취한 것이다. 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감옥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중죄임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들켜 꿈에서처럼 경찰에게 잡힌다면 나는. 아니, 신묘마루는! 손 틈새로 희미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깥에서는 서서히 새들의 소리나 점점 부산해지는 도시의 소음이 커져간다. 무엇인가 마음에서 꿈틀대는 느낌이 들었다. 침대를 벗어나 바로 섰다. 어떠한 결의가 생긴 듯이.

 

-

 

낙엽으로 붉게 물든 거리는 가을의 정취가 있지만 헐벗어 마른 나무들을 도리어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긴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계절은 겨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순간들도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낙엽들처럼 하나씩하나씩 떨어지는 법이었던가.

세이자!”

저 앞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는 듣지 못할 줄 알았던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세이자, 많이 기다렸단 말이야. 어서 와.”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훗 하고 웃음을 살짝 가을바람에 싣고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복권 당첨금을 부정 수령했던 그날 아침, 나는 날이 밝자마자 경찰서로 달려갔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에는 온통 자수를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더 커져 정말로 영영 신묘마루를 못 만날지도 몰랐다. 신묘마루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면 신묘마루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결심도 소용이 없게 된다. 경찰서에 도착했다. 그런데 거기서 한 번 더 공황이 엄습했다. 양심은 얼른 들어가서 자수를 하라며 나를 떠밀었지만 본능은 나의 움직임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시간은 무심히 흐르는데 경찰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저기,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때 경찰관 한 분이 다가와 내게 물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입을 뗄 수 있었다. 세상이 떠나갈 듯 슬프고 떨리는 목소리로.

, 자수하러. , 왔어요.”

 

나는 조서를 작성하는 경찰관에게 전날부터 있던 일을 그대로 고했다. 복권의 회차를 조작하여 은행에 가져간 일과 당첨금 부정 수령을 한 일은 물론 그때 은행 창구 직원으로부터 들었던 내용들까지 기억에 남은 것에 한해서 전부 말했다. 내가 한 짓을 들은 경찰들은 황당한 듯 코웃음까지 쳤다. 그러나 은행 창구 직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쩐지 분위기가 더 심각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 직원이 비밀번호를 직접 설정해줬다고요? 돈은 다음 주부터 쓸 수 있다 그랬고?”

조서 작성을 마친 경찰서 안은 분주해졌다. 몇몇 경찰들의 무리는 급히 밖으로 나갔고, 경찰서 안에 남아있으라는 말을 들은 나는 몇 시간이고 그저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오고가는 사람들로 붐비고 시끄러운 공간에 나 혼자만이 유배된 죄인처럼 고독했다.

 

하루 꼬박을 경찰서에 머물렀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그 답답한 공간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전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마치 다리에 족쇄가 채인 채로 밖을 나온 기분이었다. 24시간이 조금 넘은 시기에 자수를 했으니 형량을 줄일 수 있겠지만 부정 취득한 금액이 너무나도 커서 재판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경찰의 말이 떠올랐다. 거기에 더해 내 통장이 사기에 연루되었고, 나는 그 피해자이기도 하다며 또 다른 재판에도 참석해야 할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런 바보짓을 한 거지.

세이자?”

신묘마루?”

신묘마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캄캄한 어둠의 저편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 내가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 서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평소라면 위안을 받았을 그런 존재였지만 지금은 미안한 감정, 죄스러운 감정이 내 속을 뒤집어놓았다. 홍수처럼 눈에 고인 눈물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해 흘러내렸다. 넘쳐흘렀다.

세이자! 무슨 일 있었던 거야? 고향 내려간다고 하지 않았었어?”

신묘마루. 미안해. 으으.”

신묘마루가 나에게 달려와 안아줬다. 나는 그 작은 몸에 고개를 파묻고 울었다.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숨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고, 신묘마루도 많이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사실. 저번에 샀던 복권을 조작해서. 돈을 받았는데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수하고 경찰서에서 조사도 받아서.”

신묘마루의 표정에 당혹감이 역력했다. 그 동안 신묘마루와 함께 지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저 눈치만 보며 가만히 있었다. 신묘마루의 얼굴을 보아하니 이제 신묘마루는 나에 대해 아주 신물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게 그 동안 내가 보여 온 모습들이 있었으니. 아아,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 건가, 싶을 때였다.

이 바보야!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네가 진짜 어떻게 돼버리면, 그러면 난. 나는.”

울고 있었다. 신묘마루는 내게 외치며 큰 소리로 울었다. 이 또한 난생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대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한 거야, 나한테 말도 없이.”

그 물음에 나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신묘마루는 울면서까지 나를 생각해주고 있었다. 신묘마루는 늘 나를 위해줬는데 나는 늘 걱정만 끼쳤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체 신묘마루에게 무슨 짓을 해온 거지. 그저 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서로 껴안은 채 한없이 울었다. 너무나도 춥고 어두운 밤이었다.

 

-

 

난생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일들이 많은 나날들이었다. 국선변호사를 선임해보기도 하고, 검찰 조사도 받아보고, 법원에서 재판도 받았다. 전부 좋은 기억들은 아니었지만. 수시로 이런 무시무시한 데에 불려나가다 보니 학교에 출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 조사와 재판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듯하였으니 성적이니 출석이니 하는 것들은 어떻게 되든 좋았다. 신묘마루는 학교를 성실히 다니는 중에도 나와 꾸준히 연락을 하고 만나줬다. 매일 경황이 없고 우울해하는 나를 늘 이해해주고 위로해줬다. 나는 실제로 그런 신묘마루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언제는 이런 말도 해줬다.

나는 네가 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아. 그러니 다시 예전처럼 함께 학교를 다니자.”

우울한 나날을 버티게 해준 그 한 마디를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때 내가 새로 결심한 것은 이제 반칙 따위로 소망을 쟁취하려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저 잘 이겨내고 쭉 신묘마루의 곁에 있겠다는 마음이었다.

재판을 받는 날이 다가왔다. 변호사가 어차피 집행유예로 끝날 테고 재판도 금방 끝날 거라 말해줬지만 그래도 처음 겪는 일에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법원을 향하는 길에 신묘마루가 따라와 준 덕에 위안은 됐달까? 도착한 법원은 지옥의 염마처럼 두렵게 내 앞에 우뚝 서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서있던 것은 염마 같은 법원만이 아니었다.

세이자!”

, 엄마?”

오른쪽에 하나만 나있는 하얀 날개와 저 이상한 옷차림. 분명 엄마였다.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나타나 나는 굳어버렸다. 달의 도시에 있을 사람인데 어떻게 여기에.

야 이 년아!”

엄마가 나에게로 매섭게 달려왔다. 그러고는 내 등짝을 손바닥으로 마구 때리는 것이었다.

이 년아, 이 년아! 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범죄까지 저지르냐!”

아팠다. 아팠지만 화를 낼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가만히 등을 내줄 뿐이었다. 그러다 점점 등에 닿는 힘이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엄마의 얼굴을 봤다.

힘든 일이 있었으면 엄마한테 먼저 상담을 했어야 했지 않았니. 아이고 우리 딸 그 동안 얼마나 고생했을까.”

아아, 엄마는 울고 있었다. 법원에 가는 길에서는 신묘마루와 함께이니까 울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예상도 못한 일에 결국 나도 따라 덜컥 울어버리고 말았다. 아아, 그래도 엄마는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던 건데. 그 날 흐른 눈물은 아마 내 생에 가장 슬픈 눈물이었다.

 

-

 

피고인은 스스로 지은 죄를 모두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으며 또한 초범이었던 점 그리고 범죄를 저지른 후, 자수를 한 부분까지 참작하여 1년간의 집행을 유예한다.”

 

재판은 그 동안의 고생한 기간이 무색하게 1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끝났다. 선고는 변호사의 말대로 집행유예로 나왔다. 엄마와 신묘마루는 중형을 피했다며 대신 좋아하며 안도했다. 그러나 이제 한 시름 놓아도 될 상황이었음에도 나는 마음이 홀가분하지 않았다.

엄마는 다시 달의 도시로 돌아갔다. 복권 조작에 대한 재판은 모두 마무리되었으나 이번에는 대포통장 사기 피해자와 증인으로서 검찰 조사와 재판 참석을 요구받았다. 높으신 분들이 말하기로 내게 통장을 만들어준 그 은행 직원이 계좌는 내 명의로 만들어놓고서 내 개인정보와 그 사람이 설정한 비밀번호로 당첨금을 자신이 멋대로 유용했다는 것이다. , 그 당첨금은 애초부터 내 돈은 아니었지만. 또 다른 복잡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내 잘못이 아니고 조사도 잠깐만 받으면 됐기에 귀찮은 것만 빼면 크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 또한 내 마음이 홀가분하지 않은 원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음 한 구석에 들어찬 이 답답한 응어리는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

 

세이자, 많이 기다렸단 말이야. 어서 와.”

가을 햇살에 비치는 신묘마루의 미소는 그 어느 풍경보다도 아름다웠다.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하마터면 다시는 보지 못할 그런 미소였다. 덧없이 흘러가는 계절 속에서도 그녀는 꿋꿋이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를 나를 위해.

왜 이렇게 늦었어?”

천진하게 내게 묻는 신묘마루. 그 동안의 소란들이 어느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잠깐의 감상 후에 나는 입을 열었다.

우루미 그 년이 지각 인정을 안 해주려 하잖아!”

분노에 찬 외침. 신묘마루는 깜짝 놀란 듯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분노를 쭉 쏟아냈다.

수업 종료 10분 전에 가도 출석한 건 한 거잖아? 그런데 왜 결석 처리를 하려 하냐고! 내가 좀 봐달라고 사정사정하려고 교수실도 가, 학과사무실도 가, 아니 우루미년이 친구 만나러 간다고 심리학과 가는 것도 따라갔는데, 심리학과 교수 코메이지인지 코맹맹이인지를 내가 왜 알아야 하냐고!”

하하, , 그래. 애들 기다리겠다. 어서 가자.”

그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나는 달아오른 화를 가라앉혔다. 오늘은 조별과제 회의를 하러 조원들끼리 모이는 날이었으니까.

 

재판이 끝나고 난 후, 평소와 같은 일상이 금방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부쩍 연락이 는 엄마와 왠지 평소보다 더 기분이 고양된 것 같은 신묘마루의 모습이 불편한 위화감으로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내 마음속의 답답함은 더욱 나를 짓눌러댔다.

시간은 언제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2학기의 한복판이었다. 나는 여전히 학교도 나가지 않은 채 내 방 안에서 뒹굴고 있었다. 학교에 있는 신묘마루와 톡을 해대면서. 오렌지색 햇빛이 방 안에 무겁게 내려앉고 나서야 게으른 마음이 어느 정도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래서는 예전과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신묘마루는 내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멍청하기로서니 그 말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엄마나 신묘마루의 달라진 태도 또한 딴 뜻이 있을 게 분명했다. 내 소망은 신묘마루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며 신묘마루를 행복하게 해줄 방법은. 창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답답한 원룸촌의 건물들 사이로 가장 밝은 별 하나가 빛났다.

그 다음 날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그 날 수업에 모두 출석한 것이었다. 남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겠지만 이건 지난밤 내내 고민하고 숙고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여전히 나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신묘마루의 곁에 온전히 있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생각해낸 것은 졸업해서 번듯한 직장을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엄마한테 구걸하는 것도, 복권을 사는 것도, 엄한 범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닌 최후의 방법이었으니.

하지만 나는 본성부터가 성실과는 맞지 않은 부류다. 학교를 꾸준히 다니는 것이 나에게는 여간 고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타협을 했다. 적어도 결석은 하지 않기로. 그러면서 최소한 성적관리는 하기로. 부쩍 학교에서 만나는 일이 잦아진 탓인가 신묘마루는 놀라는 눈치면서도 한편으론 나를 대견하게 보는 모습이었다. 그게 나는 쑥스러웠지만 신묘마루의 표정이 좋아 보여 나중에는 나도 즐겼다. 그런 조금은 달라진 일상에 신묘마루가 고양된 기분으로 나를 보던 태도는 다시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의 마음에 답답하게 자리하던 이 알 수 없는 답답함도 사라져갔다. 그래 그 답답함의 정체는 이 별것 아닌 일상이 별것 아닌 그대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별것 아니지만 소중한 이 일상, 신묘마루와 함께 누려나갈 이 일상을 되찾은 그때야 비로소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

 

계절은 근심 같은 낙엽들을 떨구고는 부지런히 그 끝자락으로 달렸다.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도 흥에 겨운지 술을 퍼질러 마시고 서로 떠들고 소란을 피워댔다. 나는 그 알콜에 찌든 공간이 영 버거워 몰래 바깥으로 나갔다. 차라리 추운 게 나았다. 한 번 푹 쉰 한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모였다 흩어진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로 긴 한 해였다. 기억하기 싫은 실수도 했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과의 평범하고도 소중한 일상을 되찾기도 했다.

세이자 나와 있었네?”

, 신묘마루. 추운데 안에 안 있고?”

너무 정신없어서 나왔어.”

평범한 일상은 조금씩 바뀌기도 했다. 이번 학기 동안 이 내가 부지런히 학교생활을 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2학기 초반을 제외하고 지각은 할지언정 결석은 하지 않았다. 2점대를 간신히 넘던 성적도 이번 학기에는 3점대를 받을 수 있었다. 턱걸이기는 해도.

한 해가 벌써 끝나간다니 믿기지 않는다, 그치?”

글쎄다.”

올 한 해 세이자도 엄청 노력했고! 장하다, 장해!”

신묘마루는 내 등을 토닥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에 알콜 냄새로 불쾌했던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신묘마루가 없었다면 나의 결심도, 바뀐 일상도 없었을 터였다. 같이 공부도 해주고, 함께 있어주고, 심지어는 트라우마였던 조별과제도 극복할 수 있게 격려해줬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는 신묘마루의 모습도 억지로 들뜬 척을 하던 때와는 달리 자연스러웠다. 신묘마루도 좋아하니까 덩달아 나도 의지가 생기는 것 같았고, 그리고 대학을 다닌 이래 처음으로 종강총회도, 또 그 뒤풀이도 참석하긴 했지만.

원래 종총이 저런 술주정뱅이들이 모여서 노는 거야?”

이번에는 펜션도 빌리고 좀 크게 열어서 평소보다 사람이 많이 모였네. 안 오던 선배들도 오고.”

찬바람을 맞은 듯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년에는 신묘마루에게 말해서 종총은 오지 말아야지.

그래도 좋다~ 학기 마지막까지 너랑 같이 있을 수 있다니. 행복해.”

흠칫 놀라 신묘마루를 바라보았다. 신묘마루가 행복하다고 말해줬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신묘마루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가 가득했다. 아아, 어쩌면 진짜로 알 것만 같았다. 곁에만 있어도 좋다는 그 말을. 신묘마루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방법을.

세이자, 웃고 있네?”

, 내가 웃고 있었나?”

나도 모르게 드러난 미소가 들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나를 보고 신묘마루는 다시 웃더니 내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춤출까?”

?”

신묘마루는 내 손을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처음에는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렸지만 이내 자세를 잡았다. 서로 맞댄 채 쭉 뻗은 한쪽 팔, 신묘마루를 감싼 나의 팔과 내 어깨 위에 얹힌 신묘마루의 손. 몸이 기억하는 대로 우리는 서로 몸을 맞댄 채 천천히 움직임을 맞춰갔다.

슬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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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 한 번에 첫 만남의 기억이 스친다.

턴 한 번에 철없던 과오가 눈 속에 묻힌다.

마주보는 얼굴에는 한 겨울 별무리처럼 밝은 미소가 퍼진다.

한겨울밤 그 어디보다 빛나는 순간은 끝없이, 끝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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